2009 세계일주 배낭여행/북미

2009_05_29 미국_훼잇빌 : 꿈을 꾸기에도 힘든 세상

에어모세 2009. 6. 2. 06:52

 

비록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인터넷을 통해 접한 지난 일주일간 한국의 상황은 나에게도 큰 놀라움이었다. 

지난 주말 처음 소식을 접하고 아내는 눈물을 보이기 까지 했다.

 

영어 공부하는 것도,

다음 여정을 준비하는 것도,

모든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오랜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보는 시간이 많았다.

 

오늘도 중간에 자주 끊기며 연결이 원활하지 못함에도 인터넷 방송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2002년 대선 때, 그에게 표를 던지긴 했지만,

사실 난 노무현의 적극 지지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순수한 지향을 믿고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라고 한 것 처럼

그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었고, 기득권층에게는 눈엣 가시였을 것이다.

그 희망에 대한 좌절감이 가장 큰 안타까움이다.

 

도대체 현실정치의 벽, 그 기득권의 철옹성은 얼마나 단단한 것일까?

20세기 접어들며 격동의 역사를 통해 자리잡은 그 보수 기득권의 경계는 그렇게 견고한가?

심지어 대통령 조차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는 저 무서운 보이지 않는 손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언제부터인가 아니 처음부터 삶의 기준과 진리는 현실과 이상이 분리되어 있었다.

우리가 무엇이 옳은 지에 대한 답은 그 옛날 도덕 시험지 속에서나 존재하고 있었다.

왜곡된 현실에 소외되고 있는 이들조차 옳은 것을 거부하고 기득권으로 편입하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그것이 성실이고, 그것이 열정적인 삶으로 간주되어 왔다.

옳은 것은 단지 꿈일 뿐이고, 그것에 대한 집착은 단지 몽상가일 뿐이다.

 

그 유아적인 몽상가가 감내하기에 현실은 너무나 근엄하고 냉혹하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제로, 그리고 또 한번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을 주제로

예전에 누군가와 언쟁을 심히 한 적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난 현실을 전혀 모르는 순진무구한 몽상가로 내몰리고 말았다.

그와 난 모두 크리스쳔이 이었다.

 

그 현실을 지켜나가기 위한 시스템을 확대재생산하는 이들이 많은 사회가 행복한 사회일까?

순진한 몽상가들이 많은 사회가 행복한 사회일까?

답은 명확하지 않은가?

적어도 예수를 주로 믿는 이들에게는 더구나 ...

 

현실을 극복하는 것은 현실을 고려하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옳은 것을 지향하는 몽상가들에 의해서이다.

일찍이 신영복 선생님은

우둔한 사람들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나간다고 설파했다.

 

 

내년엔 난, 다시 현실의 바다로 돌아갈 것이다.

그 넘실대는 현장에서 굳이 성공하고 싶지 않다.

단지 꿈꾸며 행복하고 싶을 뿐이다.

 

 

이런... 꿈을 꾸기에도 힘든 세상이여...

젠장... 성공하지 않고서는 행복하기 힘든 세상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