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국가시책에도 불구하고
빼꼼히 이불 사이로 텔레비젼을 주시하고 있던 어느날 밤,
여행 이야기를 차분히 풀어 놓던 김찬삼 할아버지를 TV 브라운관 속에서 만났다.
할아버지의 이야기 보따리에 난, 그때까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담벼락 밖의 세상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후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 내가 가장 애착을 가진 교과서는 바로 사회과부도 였다.
얼마전 이 분이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보았다.
내 어린 시절에도 할아버지셨으니,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장수하신 것 같고
더불어 그 일생도 행복했으리라 믿는다.
10대 후반,
가수 들국화에 열광했다.
그들이 부르는 세계로 가는 기차를 들으며 나도 그 기차에 동승했다.
그들을 통해 비틀즈를 알았고, 존 레논의 '이매진(Imagine)'을 들었다.
그들을 통해 김민기를 알았고, '바람과 나', '봉우리'를 들었다.
나에게 복음과도 같았던 이 노래들을 배경음악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덕분에 공부는 별로였다.
20대 후반,
신영복 선생님의 저서 '더불어 숲'을 읽었다.
오랜 사색으로 벼려진 감성과 넓고도 깊은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더 이상 상상 속 먼 곳의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옆마을 이웃의 바로 오늘 이야기로 느껴졌다.
30대 중반,
답답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도저히 견디지 못해,
당시로서는 느닷없는 무모함을 발휘하여 한달간 회사를 휴직하고 혼자서 유럽으로 날아갔다.
첫 배낭여행의 행복을 나름 최고조로 누리며 다니던 중,
어느 허름한 숙소 한켠에서 세계일주 배낭여행 중인 한국 청년을 만났다.
그리고 밤새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가슴이 터질 듯 했다.
그리고
막연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서른 아홉,
결혼을 했다.
아내에게 청혼하면서 동시에, 막연하지만 확고했던 나의 꿈을 제안했다.
아내가 동의했다. 막연한 꿈은 구체적인 계획으로 옮겨졌다.
나이 마흔,
11개월 동안 아내와 함께 지구 한바퀴를 헤맸다.
...... ...... ......
이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제자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떠났지만
분명 제자리임에 틀림없다.
부모님과 가족, 친지, 친구들 그리고 따뜻한 이웃들이 있는 우리의 자리이다.
여행은,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 오는 순간부터 다시 시작된다는 말은, 일단 접어 두자.
사랑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품에 안기는 평화로운 안식과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 행복한 설레임의 느낌은
한낱 미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본능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늦잠을 자진 않았지만
내 집에서의 게으른 아침을 만끽한다.
지난 1년동안 항시 약간의 긴장감을 갖고 아침을 맞이 했으나
오늘 아침은 그야말로 가장 평화로운 아침이다.
역시 제자리다.
배낭을 쏟아 부었다.
옷들은 모조리 빨래통으로 보내졌고
각종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구분해
버릴 것은 버리고, 가지고 있을 것은 한 켠에 모아 두었다.
욕조에 물을 받아 세제를 풀고 빈 배낭과 작은 가방들을 담가 놓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이처럼 하나씩 정리해 가지만,
내 머릿속에 흩어져 박혀 있는 지난 1년간의 기억들을 정리하는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이제,
현실적인 과제 또한 정리하고 선택하고 헤쳐나가야 한다.
집착하지는 않지만 될 수만 있다면 아이도 가져야 하고,
이제 무일푼인 우리의 생존을 위해 직업도 선택해야 한다.
굳이 직장생활이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이던 경제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반복되는 일상의 비루함을 떨치고자 모든 것을 접어 두고 뛰쳐나갔지만
다시 그 현실로 들어가야 하다니...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아니지, 이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고쳐잡아야지...
반복되는 것 같지만 날마다 새로운 생각으로
비루한 일상이 아닌 신비한 삶의 한 부분으로
작고 소박하지만 위대한 행복의 소중한 한 조각으로
삶을 대하는 자세와 사람을 대하는 자세를 고쳐 잡아야 하겠다.
우리에겐 너무나 소중하고도 거창했던 추억이 있지 않은가!
그 추억을 자양분 삼아 앞으로의 삶을 대하는 자세와 의지를 다잡아 본다.
아직까지 한껏 부풀어 있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현실적인 과제들에 대한 고민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담, 좀 더 부풀어 있자. 그리고 한동안 오랜만의 반가움을 실컷 누려야겠다.
그리고 나서 ...
좀 고민해 보지 뭐...^^
암튼 우리는 '제자리'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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