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욕심이 너무 많았다.
내가 기대가 너무 컸나 보다.
오전엔 분위기가 좋았다.
숙소를 나와 시내로 가기 위해 이층버스를 탔다.
바로 뒷자리에서 한국말이 들려 돌아보니 우리랑 비슷한 또래의 아빠와 딸이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잠깐 대화를 나눴다.
에든버러에 며칠 전에 왔고 1년간 머무른다고 한다.
우리는 그제 왔고 아들과 함께 영국의 몇 개 도시를 여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보기 좋단다. 부럽단다.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가고 은근 기분이 좋았다.
오늘의 첫 방문지, 카메라 옵스큐라.
하린이가 신났다.
한국에서 가봤던 트릭아트의 종합판인데 어른들에게도 아주 재밌는 곳이다.
옥상에서 바라보는 에든버러의 전경도 일품이다.
에든버러 올드 타운을 가로 지르는 로열마일에는, 오늘도 프린지 축제의 열기가 대단하다.
자잘한 기념품 여러 개를 사느니 제대로 된 하나를 사자는 하린이의 의견에 후드티 하나를 골라 입었다.
그 기분을 이어 점심으로 오잉크 버거(돼지고기 바베큐 햄버거)를 먹었다.
맛있게 먹긴 했는데, 하린이가 소스를 바지에 잔뜩 묻혔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맨날 뭘 이렇게 흘리고 묻히고... 도대체 왜 그러니?"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잔소리와 함께 숙소로 돌아와 옷을 갈아 입히고, 좀 쉬다 다시 나가려는데...
편의점에서 사준 축구선수 카드만 만지작거리며 힘들다고 나가기 싫단다.
속으로 조금씩 뭔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겉으로는 차분히 달래서 다시 시내로 들어갔다.
프린지 축제에 왔으니 정식 공연을 하나는 보고 가야겠지.
언어의 제한을 가장 덜 받는 음악공연, 특별히 아카펠라 공연을 선택했다.
아뿔싸, 노래만 부를 줄 알았더니,
마치 뮤지컬처럼 전체 스토리가 있어 출연자들이 연기를 하면서 중간중간 노래를 부른다.
계속되는 하린이의 질문.
"아빠, 뭐라 그러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일단 노래만 잘 들어보자."
설명해주지 못하는 미안함과 하린이의 계속되는 질문이 다른 관객들에게 방해될까봐 전전긍긍하며 1시간을 힘겹게 보냈다.
하린이도 그 1시간이 힘들었던지 공연이 끝난 후 짜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을 둘러보며 스코틀랜드의 역사 이야기도 좀 해주고
밤의 에든버러는 어떤 모습인지 함께 보고 싶었으나
하린이는 무조건 숙소만 고집한다.
갑자기 인터넷은 왜 안 되지?
대충 종이 지도보고 걸어 가려 하니 이번엔 다리 아프다며 버스만 고집한다.
설상가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단 방향 생각하지 않고 아무 버스나 올라 탔다.
언성을 크게 높이지는 않았지만 말의 내용은 제어가 되지 않았다.
이 여행의 시간과 돈에 대한 기회비용의 문제.
짜증내기 전에 너의 의견을 진지하고 차분히 아빠에게 먼저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는 방법의 문제.
여행 출발 전부터 주입시켰던, 예기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여행 중엔 초긍정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는 태도의 문제 등.
봇물처럼 내 입에서 쏟아졌다.
내가 좀 과했나 싶어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봤다.
하린이도 아무 말없이 반대편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초딩 둘이 서로 삐쳐 고개를 돌린 모습이다.
다시 인터넷이 작동되어 숙소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찾아 갈아탔다.
퇴근 시간과 맞물려 도로가 꽉 막혔지만
오히려 더디 가는 버스 안에서, 낮에 보았던 풍경과는 또 다른 에든버러의 풍경이다.
점점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그럼 나는 어떤가?
하린이의 눈높이에서 생각해 본 걸까?
하린이를 감안한다고 하면서 내 눈높이에서만 생각한 건 아닐까?
만 여덟 살 나이에 이렇게 먼 곳까지 온 게 처음이고,
부르튼 입술 때문에 불편한 상황이고,
하린이가 나와 관심사가 다른 것은 당연지사.
먹는 거 입는 거 챙겨주면 하린이에 대한 배려가 끝난건가?
오늘 아침에 만난 한국인 뿐만 아니라, 우리 여행 이야기를 들은 많은 분들이 나한테 좋은 아빠라고 했다.
그때마다 우쭐했지만 난 절대 좋은 아빠가 아니다.
좋은 아빠 코스프레 중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렀다.
아직 일주일 이상 남았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아빠의 체면을 유지하면서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불쑥,
"아빠, 내일 요크 들러 리버풀 갈 때는 내가 잘 해볼게"
"아빠, 우린 지금 원없이 돈 쓰고 있는 거 알아?"
"그게 뭔 소리냐?"
"원, 한국 돈 말이야. 원화 없이, 그니깐 원 없이 파운드만 쓰고 있다고..."
재미있긴 한데, 이런 분위기에서 뜬금없이...
이 뜬금없음... 어디서 많이 봤는데...
하린이가 지 엄마를 닮았다,
나도 이 분위기에 하린이를 위한 선심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 근처에 봐둔 한국음식 메뉴가 적혀 있는 식당을 찾았다.
어라?
흘러나오는 음악도 중국 노래...
직원도 중국인...
된장찌게와 볶음밥에서도 중국 냄새...
도저히 하린이를 위한 선심이 될 수 없어
편의점에서 축구선수 카드를 한번 더 사줘야 했다.
계획을 수정했다.
내 욕심과 기대를 많이 덜어 내기로 했다.
10개의 미션은 여행의 최소한의 동기 부여 용(用)이었다.
이걸 시작으로 다양한 경험과 스토리를 전해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 10개의 미션은 이 여행의 목적이다.
이 미션만 잘 수행해도 만 여덟 살 하린이의 성공적인 여행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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