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한번 늘어지면 계속 늘어지는 법,
요 며칠 게으름을 한껏 피웠더니
오늘도 여전히 늦잠을 잤다.
늦잠도 늦잠이지만 그닥 여행의 의지도 약해졌다.
레딩에서 나오면서 동생과 제수씨의 추천도 있었고
영국 들어 오기 전부터 나름 생각한 것이 있었다.
런던만 둘러 볼 것이 아니고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지역의 에딘버러나
영국 중부 리버풀이나 멘체스터,
그리고 런던 근교의 캠브리지에 들러 보고 싶었다.
다 둘러 보지 못하더라도 한 곳이라도 정해 가 볼 생각이었는데...
지금 마음 같아서는 런던 시내 구경도 귀찮다. ㅋㅋ
레딩에서 너무 편한하게 지내다 와서 그런 지,
그동안 너무 피곤한 여정을 겪어 와서 그런 지,
아니면 런던 날씨가 사람을 축 쳐지게 만드는 건 지...
이렇게 있어서는 안되겠다 싶어, 일단 숙소를 나왔다.
여전히 날씨는 흐리다...
발길이 향한 곳은 뮤지컬 극장이다.
이런 마음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아내와 나의 공통된 생각이 바로 뮤지컬 관람이었던 것이다.
오늘 보게 될 뮤지컬은 소설 오즈의 마법사를 모티브로
새로운 상상력으로 창작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위키드(Wicked) 라는 작품이다.
오페라의 유령, 맘마미아, 빌리 엘리어트 등등 여전히 인기를 끄는 작품이 있는 한편
요즘 새롭게 인기를 모으고 있는 작품들이 있는데
위키드는 그중의 하나로서 풍자적 스토리, 음악, 무대장치 등
여러 측면에서 요즈음 가장 주목받고 있다.
학생할인을 받았다.
그것도 50% 나...
50파운드 짜리 명당 자리를 25파운드에 산 것이다.
사실, 오페라의 유령과 빌리 엘리어트는
가장 싼, 20파운드 짜리 좌석에서 봤다.
한번은 2층 한쪽 끝 구석에서, 한번은 무대 바로 밑 맨 앞자리에서 봤는데
무대 전체가 보이지 않는(Restricted View Ticket) 단점이 있어 아쉬움이 있었다.
오늘은 당당히 1층 한 가운데 무대 전체를 한 눈에 보며 뮤지컬을 즐기게 되었다.
예매를 하고는 점심 겸 저녁 식사를 위해 피자 부페에 갔다.
딱히 땡기는 게 없을 때, 본전을 뽑기에 가장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결과는, 실력 발휘(?)를 못했다.
종류는 다양했지만 열 조각밖에 먹지 못했다.
한 끼를 떼우기에 가장 만만한 피자는
여러 나라에서 먹어 봤고 심지어 이탈리아에서도 먹어 보았지만
역시 한국 피자가 제일 맛있다.^^
숙소로 돌아와 인터넷을 뒤져 대충 스토리를 숙지한 후,
시간에 맞춰 극장으로 갔다.
뮤지컬이 시작되었다.
좋은 음악, 뛰어난 노래 솜씨,
현란한 춤, 화려한 조명과 무대 장치들,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인데......
배우들의 대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니
작품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가 없다.
풍자적인 주제와 코믹한 요소들이 이 작품의 특징인데
그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니 그저 음악과 보여지는 쇼만 감상할 뿐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그 훌륭한 음악이 핵심이니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배우들을 통하여
그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감동의 전율이 그대로 전달되었고
빌리 엘리어트는 비교적 단순한 스토리이고
댄스와 쇼적인 요소의 비중이 커
대사 전달의 문제가 그리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위키드는 좀 달랐다.
잠깐이나마 인터넷을 뒤져 대충의 줄거리를 알고 가지 않았더라면
보는 중에 지루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계속해서 터지는 관객들의 웃음에
아내와 나, 우리둘만 뻘쭘하게 서로 바라 보다가 멋적게 따라 웃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늦은 밤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만은 가볍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큰 배낭에 짓눌린 무거운 발걸음이 아니라 뮤지컬 배우의 경쾌한 발걸음이다.
연이은 흐린 날로, 그리고 늦가을의 스산함으로, 가라앉은 런던의 밤공기가 왠지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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