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떠나 다시 요르단으로 돌아간다.
일단 국경을 넘어 암만으로 가서 페트라가 있는 요르단 남부 와디무사로 향한다.
비록 2박3일간 잠시 머물렀지만 가장 많은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떠난다.
그동안 뉴스를 통해 단편적으로만 접했던 이 곳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그 배경과 역사에 대해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다.
깊이 있는 공부는 못했지만
몇 가지 책(아니, 짧은 글조각들 이라고 해야 옳겠다.)을 뒤적거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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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800년 경 부터 가나안이라고 불린 이 지역은,
파라오 시대에 이집트 제국의 일부였었고,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부터 '유대의 언덕'으로 알려진 이 곳으로
자신의 유목민을 이끌고 들어왔던 때까지 1000년 동안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매우 다양한 관점의 역사 해석으로 첨예한 분쟁의 중심이 되고 있지만
기원전 20세기 경에 이 곳으로 이주한 아브라함과 그의 유목민인 가나안 부족이
최초의 정착민이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후,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가뭄과 기근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이집트로 이동했으나,
그 후손 중의 하나인 모세가 기원전 1250년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종식시키기 위해
시나이 반도를 거쳐 가나안으로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돌아와 다시 자리 잡았고,
비슷한 시기에, 블레셋이라 하는 해양 세력도,
현재의 아쉬다드와 가자 지구에 걸친 지중해 연안에 정착하였다.
이 블레셋의 우월한 힘에 위협받던 이스라엘 민족은 사울왕을 중심으로 12지파가 연합하였고,
사울왕이 죽자,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죽인 영웅,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 예루살렘 도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10세기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이 최초로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기에 이른다.
이것은 물론 이스라엘 관점에서의 역사이다.
지금 현재 중동에서는,
블레셋 혈통의 팔레스타인과 유다족속을 조상으로 여기는 유태민족이,
서로 이 땅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심각한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유태인들은 신이 이스라엘을 유태인에게 주었다는 구약성서의 내용을 주장하고
다른 편에서는 아랍민족의 대부분이 적어도 7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곳에 정착하여 살아 왔음을 지적한다.
- 자국 건설의 희망
전쟁과 방랑, 억압, 귀향의 오랜 세월을 거쳐 19세기 말에 이르렀을 때,
오스트리아의 유태계 언론인이었던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e Herzl)은,
1896년 그의 저서에서, 유태인은 그들의 고유한 나라를 세워야만 한다고 저술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학살과 반유대주의의 위험이 유럽에서 높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듬해 그는 첫번째 국제 시온주의자들의 모임을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했고,
유태인들의 국가를 세울, 지구상의 어느 한 부분을 찾기를 논의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우간다가 거론되기도 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서가 말하고 있는 조상들의 땅인 팔레스타인 지역을 선호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건국을 약속한 벨포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에 힘입어
세계 각 처의 유태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해 오기 시작했다.
1920년대 말, 이주자의 수가 급증하자 아랍, 유태인, 영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어 갔다.
유럽에서는 1930년대 히틀러가 등장하고, 유태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어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까지 무려 6백만명의 유태인들이 동유럽의 죽음의 캠프에서 죽임을 당했다.
- 독립을 위한 투쟁
홀로코스트(대학살) 이후에 수천명의 생존자가 영국통치하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도착했는데
이 지역의 아랍인들에게는 이전보다 더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1947년 2월,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부풀어 오른 긴장감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게 되자
이 문제를 유엔에 떠넘기게 되고, 아랍과 이스라엘의 영토 분할을 표결에 붙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에게 의미가 있는 예루살렘은 두 나라가 존재하는 도시가 될 상황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이 제안을 수용한 반면, 아랍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1948년 결국 영국은 모든 문제에 손을 빼고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했고,
급기야,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연합군이 먼저 공격해 들어 왔지만
아직 국가다운 면모를 갖추지 못한 신생 이스라엘이 오히려 아랍을 압도했다.
그로 인해 수만명의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 자기들의 거처에서 쫓겨나가게 되었다.
바로 1948년 5월 14일 이 날을,
이스라엘은 국가로서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드러내며 독립기념일로 삼았고,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알-나크바(Al-Naqba), 즉, 대참사라 일컫는다.
일단 1949년 정전협정을 맺으면서,
이집트 통치하의 가자 지구와 요르단 관할하의 요단강 서안만을 놔두고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 영토가 대략 그려졌다.
하지만 이제부터 본격적인 긴장과 대립이 시작되었다.
향후 20년은 이스라엘이 국가의 기반을 다지는 희망의 시간이 되는 듯 했지만
1967년 또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에 대해 선제공격을 감행한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6일 전쟁이라 부른다.
6일 후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를, 요르단으로부터 예루살렘과 요단강 서안을,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빼앗아
국토를 세 배로 넓혔다.
또한 1973년에는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의 기습공격을 이스라엘이 가까스로 막아내었는데
속죄일에 벌어졌기에 흔히 속죄일 전쟁(Yom Kippur War)이라 불리운다.
서방세계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이처럼 세 차례의 큰 전쟁을 모두 이스라엘이 승리했지만
팔레스타인과 아랍세계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 민족봉기
1970년대와 80년대는 카리스마 넘치는 자유의 전사 야셰르 아라파트와
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의 지휘아래 벌어진 테러활동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상황이 국제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초기에는 많은 나라들이 공포스럽게 보았지만
그 후, 1987년 첫번째 민족봉기가 일어났을 때, 그 현장의 모습을 담은,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청년들과 중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대치하고 있는 언론의 이미지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국제사회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우여곡절끝에 1993년에는
아라파트와 라빈총리가 평화협정을 맺고 노벨상을 공동수상했으며 백악관에서 악수까지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가자지구와 요단강 서안에서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라빈과 아라파트의 상호 신뢰가 이내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또 몇가지의 세부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모두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예루살렘의 영토 분할과
아랍세계에 퍼져 있는 4백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의 처리 방안이 바로 그것이었다.
게다가 골란고원 분쟁으로 인한 시리아와의 불편한 관계를 넘어서
레바논 남쪽의 테러 조직 헤즈볼라와의 계속되는 군사대결이 문제였다.
-- 2차 인티파다(Intifada, 민중봉기)
1995년 11월 4일, 극단적인 유대주의자에 의해 라빈 총리가 암살당했고
그로 인해 그간의 화해무드는 그전의 긴장관계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라빈의 죽음으로 협상이 멈추었고,
2000년도에 빌 클링턴의 중재안 또한, 이스라엘은 받아들였지만 아라파트는 거부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서로간의 테러와 복수의 폭력이 반복되면서,
팔레스타인은 두번째의 본격적인 인티파다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곧 벌어진 선거에서 매우 강경파로 소문난 전직 장군 샤론을 총리로 선택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의 온건파들이
이 지역의 평화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설립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
샤론과 아라파트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본격적인 대립 상황을 맞게 되는데
팔레스타인에서는 자살공격 형태가 나타나고, 이스라엘 방위대는 지상과 공중에서 전면적인 공습을 준비하게 된다.
-- 국제사회의 반응
2004년 후반까지 잔인한 죽음들이 일어남에 따라
인티파다에 대한 샤론 총리의 강경책은,
유럽의 정부들 사이에서 이스라엘은 냉혹한 나라로 인식되게 함으로써
국가적인 이미지에도 부담이 되었다.
경제적인 피해도 컸는데 이스라엘의 관광산업이 붕괴되었고,
팔레스타인 또한 14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대립보다는 협상의 필요함이 대두될 즈음,
평생 독립국가를 위한 투쟁의 삶을 살았던 아라파트가
2004년 11월 11일, 파리의 어느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아라파트가 죽은 지 3개월 후, 결국,
후임 마흐무드 압바스는 샤론총리와 샤름 엘 셰이크에서 회담을 갖게 된다.
'평화를 위한 로드맵'의 국제적인 지원에 힘입어
팔레스타인 당국과 이스라엘 내각은 몇 가지의 긍정적인 절차들을 시행하게 된다.
가자지구와 요단강 서안의 네개의 마을에서 유태인 정착민들이 철수하고
이스라엘 감옥에 갇혀 있던 수백명의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을 풀어주었다.
-- 하마스(Hamas)의 등장
평화로 가는 과정은, 언제나 그렇듯 더디기만 하다.
급작스럽게 샤론 총리가 병상에서 혼수상태에 빠져 버리자,
인지도가 낮은 에후드 올메르트가 대행을 맞게 되었는데, 이 사람은 무능하고 부패한 사람이었다.
2008년도 까지 자살공격이 점점 줄어 들어가긴 했지만
이스라엘과 요단강 서안을 구분짓고 있는 장벽은 계속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분노의 대상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이 두 지역을 나누고 있다지만, 사실상 팔레스타인 지역쪽으로 많이 침범하여 장벽이 세워졌던 것이다.
그동안 아라파트의 뒤를 이어 팔레스타인을 이끌었던,
마흐무드 압바스의 파타당이 평화와 번영에 있어서 성과를 얻지 못하자
논란이 많은 하마스가 가자지구와 요단강 서안에서 민주적인 투표에 의해 세력을 넓혀갔다.
요단강 서안은 계속해서 차분한 분위기였지만
가자지구는 팔레스타인 분파(주로 하마스와 파타그룹)간의 대립이 극심해져
그들 사이의 싸움이 벌어지면서 가자지구는 외부세계로부터 고립되어 갔다.
-- 현 정세와 향방
이스라엘의 골칫거리는 끊임없이 가자지구로부터 날아오는 미사일과 북부 지역에서 헤즈볼라와의 마찰이었다.
두 지역 모두에서 이스라엘이 힘겨운 상황이 되자
헤즈볼라는 자신들이 승리할 것으로 생각했고 이전보다 더 큰 규모로 재무장하기 시작했다.
샤론이 계속해서 투병중이고 현재의 총리가 부정행위로 조사를 받음에 따라 사임함으로써
2009년 2월 선거를 치루기로 했고, 평화를 위한 기회들은 줄어들고 있었다.
가자지구에서는 폭력사태가 계속되었고, 요단강 서안은 가난이 심화되었다.
헤즈볼라는 북쪽 국경지역에서 군사력과 지지를 얻고 있고
하마스의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경제력과 관광산업이 성장함에 따라
팔레스타인인들은 중동 곳곳의 난민캠프 속으로 더 움추려들고
이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이 땅에서의 평화는
수천년 동안 그래왔던 것 처럼 아직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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